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 매카트니 (문단 편집) === 기타 음악가 === * [[지미 헨드릭스]] 그가 생전이었을 때는 나이가 같기도 하고, 음악적인 성향 역시 비슷해 서로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지미 헨드릭스가 본격적으로 데뷔하기 이전 그의 떡잎을 알아보고 그가 미국 콘서트에 나가 인지도를 키울 수 있게 도와줬고, 지미에게 많은 조언을 해줘 지미 헨드릭스가 성공한 음악가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지미 헨드릭스가 인지도를 키운 콘서트인 몬터레이 페스티벌 역시 폴 매카트니의 추천으로 지미가 공연장에 나간 것이었다. 만약 폴이 아니었다면, 지미 헨드릭스는 그저 그런 기타리스트로서 생을 마감하고 일렉트릭 기타 연주법이나 하드 록의 역사 역시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미 헨드릭스]]는 그 보답으로 1967년 페퍼 상사 음반의 커버 버전을 헤비한 버전으로 커버해 폴 매카트니를 깜짝 놀라게한 적이 있다. * [[롤링 스톤스]]([[믹 재거]], [[키스 리처즈]]) 1960년대부터 롤링 스톤즈에게 곡을 써주던 친한 사이였고,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믹 재거]]가 시원하게 롤링 스톤즈는 비틀즈에게 비교 대상이 안된다고 한 적도 있었다. 1970년대에 비틀즈는 이 세상에 없었고 롤링 스톤즈만이 독주 체제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운 좋게 음악적인 성취도에서 비교가 된다는 것일 뿐이지 비틀즈 자체는 전혀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폴 매카트니 역시 [[롤링 스톤즈]]를 좋아하는 밴드로 꼽은 적이 있다. [[키스 리처즈]]와 폴은 상당히 친한 사이로 서로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고받는 사이라고 한다. * [[더 후]]([[피트 타운젠드]], [[로저 달트리]]) 캄푸치아 자선 콘서트 당시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가 만취 상태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공연을 망친 것 때문에 폴 매카트니의 분노를 불러온 적이 있다. 피트 타운젠드는 술을 마구 퍼마신 상태로 코드조차 다 틀린 채 곡을 연주했고 "캄푸치아에서 태어나지 않은게 다행 아니냐"라는 말까지 해 화가난 폴이 피트에게 "[[반어법|고마워요]]"라고 한 뒤, 피트 타운젠드를 멍청이라고 대놓고 욕한 촌극까지 벌어졌다. 그래도 화해했는지 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 폴이 Let It Be를 부를때 피트가 백업 보컬을 맡기도 했다. [[로저 달트리]]에게는 그의 솔로 앨범 'One Of The Boys' 수록곡 'Giddy'를 작곡해주기도 했는데, 서로 성격은 잘 안 맞았는지 선데이 미러 인터뷰에서 40년동안 알고 지냈지만 여전히 폴을 잘 모르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또 이 인터뷰에서 폴의 전 부인 헤더 밀스를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인물 중 가장 차가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http://soundz.egloos.com/867780|#]] * [[핑크 플로이드]] 폴은 핑크 플로이드의 데뷔 초반기때부터 그들의 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도 모두 폴과 비틀즈의 팬이었다. 후일 [[로저 워터스]]가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 제작 도중 그에게 인터뷰를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다소 어두운 분위기였던 질문에 폴 매카트니가 눈치 파악을 못하고 원래 성격대로 낙천적이고 웃기게 답변을 해 로저 워터스가 짜증이 나서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통째로 잘라버린채로 앨범을 발매해버렸다. 훗날 폴 매카트니가 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폴 매카트니가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들어보고 자신의 인터뷰 태도가 부적절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듯 하다. 그밖에도 폴이 주최한 파티에서 폴과 로저가 부부 동반으로 찍힌 사진이 있다. [[http://soundz.egloos.com/867741|#]] 그 외에 [[데이비드 길모어]]는 폴 매카트니와 협업을 여러번 했고[* No More Lonely Nights의 기타연주는 바로 데이비드가 한것이다.]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다. *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과 처음엔 선배와 후배 관계로 시작된 둘의 사이는 나이 차이를 초월하는 절친한 친구이자 공동작업자 관계로까지 발전되었으나, 매카트니가 되찾아오려고 벼르던 비틀즈의 음악 판권을 잭슨이 가져가는 바람에 둘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잭슨은 70년대 후반에 직접 매카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직접 만날 기회를 갖기를 원했고 마이클을 직접 만난 후엔 매카트니도 마이클을 마음에 들어했다. 매카트니는 작곡[* 이때 마이클에게 자신이 부를 노래는 직접 쓰는 작곡 능력을 갖춘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기를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과 음악에 대한 많은 것들을 마이클에게 알려주었고, 마이클의 첫 성인 솔로 앨범인 [[Off the Wall]]에 "Girlfriend"란 곡을 만들어서 선물까지 해준다. 또 명곡 "Say Say Say" 듀엣을 하여 [[빌보드 핫 100]] 6주 1위, [[Thriller]] 앨범의 "The Girl is mine"으로 [[빌보드 핫 100]] 2위에 올려놓으며 같이 뮤직 비디오도 제작하는 등 한창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매카트니는 마이클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려 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매카트니보다 더 춤을 잘 추려고 하지 않는 등 상대방이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했다고... 이처럼 사이가 좋았으나, 후에 잭슨이 비틀즈의 판권을 사들이면서 사이가 서먹해졌다. [[저작권]]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폴 매카트니는 판권을 사들이는 것은 훗날 굉장한 재산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한 일이고[* 그래서 폴 매카트니는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선배 뮤지션인 [[버디 홀리]]의 음악 판권을 통째로 사서 소유했다.], 그 음악들의 사용 허가 권한을 가지고 적절한 곳에서만 쓰이도록 관리하는 일의 보람 등에 대해 설명해 줬다.[*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보면 매카트니가 이걸 설명해 줬을 때 마이클이 "그럼 내가 당신의 음악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라고 했고 매카트니는 "녀석 농담은"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 되고 만다.] 아직 [[대중음악]] 판권의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았던 1960년대에 비틀즈 음악의 판권이 Northern Songs에 넘겨졌고 이것이 다시 ATV로 넘겨지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의 음악 판권은 자기들이 되찾아 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카트니로부터 판권에 대한 얘기를 들은 잭슨은 판권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됐고 우선 시험삼아 70년대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 판권을 일부 사게 되었다. 이후 [[비틀즈]]의 음악 판권이 있는 ATV가 매물로 나오자 폴 매카트니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비틀즈 판권을 사려고 했고 잭슨 또한 경쟁에 참여했다. 당시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1000만 달러씩 각자 부담해서 2000만 달러에 사자고 제안했으나 오노 요코는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구매를 포기하게 된다. 그 후 잭슨이 경쟁 끝에 4750만 달러에 판권을 사들인다.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권리를 꼭 되찾고 싶었던 매카트니는 이에 매우 실망하였고, 그것도 자기가 70년대 후반에 콜라보도 같이 했던 잭슨이 자기가 얘기해준 판권에 대한 조언에 따라 자기 음악의 판권을 사버렸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했다. [[오노 요코]]는 비틀즈 판권을 얻지 못한 것에 자기도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이클 잭슨처럼 [[비틀즈]]의 음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비틀즈 판권을 산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실제로 잭슨은 이제 자기의 소유가 된 비틀즈의 음악 사용권을 상당히 아꼈고, 비틀즈의 음악을 원칙적으로는 다른 매체 삽입곡으로 쓸 수 없도록 하는 엄격한 판권 관리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틀즈]]의 노래는 온라인 서비스도 되지 않았고 영화에서조차 삽입곡으로 쓸 수 없었다. 즉 비틀즈 음악 판권을 거액을 들여서까지 산 게 단지 그걸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여기저기 마구 쓸 수 있도록 허가해줘서 막대한 사용권 수입을 얻었을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던 걸 보면, 단지 상업적 목적을 위한게 아니라 진정으로 비틀즈의 음악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판권 문제 때문에 둘의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잭슨 사망 후 폴 매카트니는 "'''그는 부드러운 영혼을 가진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젊은이였다. 나는 그와 함께 했던 경험을 나의 특권으로 여기고 있다.'''" 라며 조의를 표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마이클 잭슨/사생활 및 일화, version=16)] * [[퀸(밴드)|퀸]] 퀸 멤버들은 모두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고[* 베이시스트 [[존 디콘]]은 언급이 잘 없지만, 11살 경 비틀즈 열풍 때문에 음악을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폴 역시 퀸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하다. 특히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극찬했다.[* "프레디는 항상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어요. 그게 곧 그 그룹의 닻과 같은 역할을 했죠."] 동시에, 브라이언 메이 역시 좋은 기타 연주자이다, 라는 말도 했다. * [[레드 제플린]] 레드 제플린 멤버들은 비틀즈를 존경했으며, 폴 매카트니 또한 최초로 헤비메탈을 시도한 만큼 최초의 헤비 메탈 밴드인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보컬인 [[로버트 플랜트]]와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라고 하며, [[지미 페이지]]와는 과거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으며 사진으로도 남아 있다. * [[비 지스]] 비 지스는 활동 초창기부터 비틀즈의 노래 Please Please Me, Ticket To Ride 등을 커버하며 존경을 표하던 사이였고 인기 절정에 오른 70년대 후반에는 폴과 교우관계가 짙어졌다. 2003년 [[모리스 깁]]이 사망했을 때, 폴은 [[로빈 깁]]과 비 지스의 노래 Too Much Heaven을 듀엣을 녹음하기도 했고 [[배리 깁]]과는 SNL 출연 등을 통해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배리 깁은 동생을 모두 잃은 그를 폴이 위로해줬다고 밝혔다. [[앤디 깁]]을 포함한 깁 4형제 역시 위의 레드 제플린처럼 공식 석상에서 함께한 사진들이 다수 남아있다. * [[엘비스 코스텔로]] 1980년대 후반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매니저의 권유로 코스텔로와 작곡 파트너십을 가졌다. 서섹스 주에 있는 매카트니의 개인 농장에서 세션이 이루어졌고 결과물은 각자의 솔로앨범에 수록되어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폴은 훗날 인터뷰에서 존과 같이 작곡했던 시절이 떠올랐다고 말했을 정도로 좋은 기억에 남았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